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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요제프 괴벨스 뜻, 어록, 선동, 히틀러

by 파라다이스토리 2024.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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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요제프 괴벨스 뜻, 어록, 선동, 히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뜻, 어록, 선동,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나치 정권의 정치 관료. 선전선동의 최고 전문가로서, 국민들이 나치 정권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주로 그의 헌신 때문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가톨릭 집안의 다섯 자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공장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던 아버지는 고등학교 과정과 대학에서 공부했던 5년 내내 그의 학비를 조달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괴벨스는 다리가 굽었기 때문에 병역에서 면제되었는데, 훗날 그의 정적들은 이것을 악마의 갈라진 발톱과 절뚝이는 걸음걸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선천적이라기보다 유년기의 질병 때문에 생겼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결함은 그에게 강렬한 보상심리를 유발함으로써 불운한 인생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괴벨스는 문학·연극·언론계에서 거의 무보수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그러했듯이 패전으로 말미암아 더욱 뜨거워진 민족주의의 열정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한 친구의 소개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눈뜨게 된 그는 나중에 상류계급 흉내를 내기는 했지만 계속 반(反) 부르주아적 태도를 지켜나갔습니다.

 

괴벨스는 처음에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존경한 스승은 유대인들이었으며 당시 그는 반(半)유대계 소녀와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괴벨스가 이때쯤 정계에 입문했더라도 그의 정치행로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가 나치스에 입당하게 된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1924년 가을 괴벨스는 국가사회주의자들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천부적으로 달변이었던 그는 이내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의 엘버펠트 지구 사무장이자 격주로 발행되는 국가사회주의 잡지의 편집장이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1926년 11월 괴벨스를 베를린 지구당 위원장에 임명했습니다(→ 히틀러).

 

NSDAP, 즉 나치당은 바이에른에서 창당되어 발전한 것으로 수도 베를린에는 당조직이 없었습니다(→ 나치당).

 

괴벨스가 베를린 지구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NSDAP의 좌익인 반자본주의파 그레고르 슈트라서와 '우익'인 당총재 아돌프 히틀러 사이의 대결에서 현명한 선택을 한 덕분이었습니다.

 

괴벨스는 내면의 신념과는 반대로 히틀러를 지지했습니다.

 

 

 

담대하고 위험을 피할 줄 모르는 성격인 괴벨스는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할 때까지 베를린에서 나치 세력을 강화해 갔습니다.

 

1928년 히틀러는 이 유능한 웅변가이자 뛰어난 선전원이며 재기에 찬 저널리스트(그는 〈공격 Der Angriff〉 편집장이었으며, 1940~45년 〈제국 Das Reich〉 편집을 맡음)를 독일 전역을 총괄하는 NSDAP 선전감독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기 위한 신화를 창조했으며, 당의 행사 및 시위의식을 제정하고 정력적인 연설을 행함으로써 독일 대중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나치당이 집권에 성공하자 괴벨스는 국가선전기구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계몽선전부'가 그를 위해 만들어졌고 신설된 제3제국의 '문화원' 원장도 겸임했습니다.

 

괴벨스는 문화원 원장으로서 선전은 물론 언론·연극·영화·문학·음악·미술계까지 손을 뻗쳤습니다.

 

 

 

그러나 국외선전·출판·연극·문학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통제권만을 행사했는데, 그 이유는 관할권을 놓고 심한 마찰을 빚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는 음악이나 미술을 규제하는 데는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고등학교 교육과 같은 영역에까지 자신의 권한을 확대하지는 못했습니다.

 

괴벨스의 문화정책은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나 극단적인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끊임없는 선동은 청중의 귀를 마비시킬 따름이라는 논리 때문에 선전 메시지들조차 제약을 받았습니다.

 

괴벨스는 교조주의보다는 효율성을, 원칙보다는 편의를 우선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괴벨스의 영향력은 1937~38년에 약화되었습니다.

 

1931년 중상류층 여성과 결혼하여 이미 6명의 자녀를 두고 있던 그는 이 기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일과 가정을 거의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처지는 제2차 세계대전(괴벨스는 이 전쟁을 달가워하지 않았음)이 일어났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승리하고 있을 때는 선전책임자가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하여 전세가 역전되면서 괴벨스는 절정기를 맞게 됩니다.

 

비로소 그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선전의 대가로서 진면목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괴벨스가 당시 상황을 왜곡선전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그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선전활동에 주력했던 것은 대중의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그 방편으로 괴벨스는 역사적인 예를 들고 여러 사례들을 비교했으며, 소위 불변의 역사법칙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최후수단으로 어떤 종류의 비밀병기들을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유력한 나치 간부들이 벙커와 요새로 숨어버린 한참 뒤에도 괴벨스는 대중 앞에 끊임없이 다가서는 용기를 보였습니다.

 

이때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그때까지 극히 부정적이었던 그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시켰습니다.

 

 

 

괴벨스의 활동은 특히 후방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바야흐로 총력전의 주창자가 되었습니다.

 

1944년 7월 20일 감행된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은 히틀러가 괴벨스를 자기 곁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8월 25일 괴벨스는 '총력전을 위한 제3제국 전권위원'이 되었으나 그가 곧 탄식했듯이 모든 것이 너무 늦게 왔습니다.

 

1945년 5월 1일 괴벨스는 베를린의 포위된 벙커 안에서 초창기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한 심복으로 히틀러를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이 재능 있는 나치의 무대감독은 아내와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함으로써 가장 소름 끼치는 잔혹극의 연출을 마쳤습니다.

 

전날 그는 히틀러의 뜻에 따라 제국의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

 

단 하루 동안, 불과 몇 평방미터의 공간 속에서 그는 그렇게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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