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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출신 공민왕 왕비 노국공주

by 파라다이스토리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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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노국공주
공민왕·노국공주 초상

 

원나라 출신으로 고려의 왕비가 된 몽골여인은 제25대 충렬왕부터 제31대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7명에 이릅니다.

 

그녀들은 원나라 황실을 배경으로 고려의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략결혼의 희생자로서 만리타향인 고려에서 남편에게 외면당한 채 외롭게 생을 마감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노국공주는 생전은 물론 사후까지도 남편 공민왕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아주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경상북도 안동 지방에서 행해지고 있는 놋다리밟기라는 민속놀이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노국공주가 공민왕과 함께 안동에 피신했을 때 만들어진 놀이입니다.

 

당시 정월대보름을 맞아 공주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공연을 펼친 것이 이 놀이의 유래라고 합니다. 그녀가 민심까지도 얻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조선 인조 때 송도유수를 지낸 이덕형이 개성 지역의 설화를 기록한 《송도기이》라는 책에는 노국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그녀가 묻힌 정릉에 보물이 많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어느 날 성에서 말 한 마리가 뛰쳐나가 정릉 뒤편에 있는 언덕까지 내달렸습니다.

 

주인이 급히 달려가 말을 잡고 나서 보니 도굴범들이 정릉에 구멍을 뚫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도굴범들이 모두 체포되면서 정릉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려가 멸망한 지 3백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노국공주의 인기는 여전했던 것입니다.

노국공주
서쪽 것이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玄陵)이며, 동쪽 것이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이다

 

 

 

보탑실리, 강릉대군 왕기와 결혼하다

고려 제31대 국왕 공민왕의 정비 노국공주(魯國公主)는 원나라 순종의 손자인 위왕(魏王) 베이르테무르(孛羅帖木兒)의 딸입니다.

 

본명은 보탑실리(寶塔實里), 공민왕이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王佳珍), 노국공주는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를 축약한 것인데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후에 인덕태후(仁德太后) 혹은 선안왕후(宣安王后)로 칭해지기도 했습니다.

 

 

 

시호에 나오는 ‘노국(魯國)’이란 공자의 고향이었던 노나라입니다. 그녀가 지금의 산동성 곡부 일대를 봉지로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 ‘대장공주(大長公主)’는 원나라 황제의 고모나 왕고모에게 붙이는 호칭입니다.

 

 

 

노국공주는 1349년(충정왕 1년) 원나라 황궁 북정에서 충숙왕의 둘째아들 강릉대군 왕기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백안첩목아(伯顏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을 가진 왕기는 보탑실리와 결혼하고 나서 2년 뒤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보탑실리는 공민왕과 함께 고려에 들어갈 때 원나라로부터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습니다.

 

 

 

공민왕은 보탑실리와 결혼하기 전에 두 차례나 고려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습니다.

 

1344년(충혜왕 복위 5년) 충혜왕이 유배 길에 사망하자 3년 전부터 원나라에서 숙위 하던 그는 황제로부터 왕위 계승권자에게 부여하는 대원자(大元子) 칭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충혜왕의 아들로 원 황실의 후원을 받았던 충목왕에게 왕위를 빼앗겼습니다.

 

 

 

1348년(충목왕 4년) 충목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또 다시 왕위 물망에 올랐지만 충혜왕의 서자인 충정왕에게 밀려 분루를 삼켰습니다.

 

이 모든 불행이 원 황실과 인연을 맺지 못한 탓이라고 여긴 공민왕은 서둘러 위왕 볼로드테무르의 딸 보탑실리와의 혼인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지극한 금슬을 과시하다

1349년(충정왕 1년), 노국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든든한 배경을 갖게 된 왕기는 원 조정의 실세인 기황후에게 충성하면서 자신이 보위에 오르면 장차 기씨 세력을 친위세력으로 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무렵 원은 각처에서 일어나는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고려 연안에 출몰하는 왜구로 인해 해로까지 막혀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충정왕을 대행하던 희비 윤씨가 마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자 승상 톡토는 총명하면서도 순종적인 강릉대군 왕기를 고려 국왕에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기황후의 동의를 이끌어냈습니다.

 

 

 

1351년(충정왕 3년) 10월, 원 황제는 사신 완자불화(完者不花)를 고려에 보내 국새를 거두고 충정왕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다음 공민왕에게 국왕승계명령을 내렸습니다.

 

그해 12월 공민왕이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황자는 태자 실독아(失禿兒)와 직성사 아홀(牙忽)을 보내 공민왕 부부를 수행하게 했습니다.

 

12살 때부터 10년 동안 원나라에 머물며 원나라 황실의 분규와 변덕을 체험했던 공민왕은 자신의 지위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음을 알고 짐짓 원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고려의 입지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속내를 숨겼습니다.

 

 

 

고려를 새롭게 일신하고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공민왕의 행보는 매우 신속하고 냉혹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그는 등극한 지 석 달 만에 강화도에 있던 조카 충정왕을 독살함으로써 잠재적인 경쟁자를 깨끗이 제거했습니다.

 

1352년(공민왕 원년) 8월에는 자신이 고려 국왕으로서 직접 정무를 총괄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하고, 무신정권 때 설립된 정방을 폐지하여 국가의 인사기강을 바로잡았습니다.

 

이어서 감찰대부 이언종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복과 변발을 금지했습니다.

 

그리하여 1274년(원종 15년) 홀도게리미실공주가 고려에 시집오면서 시작되었던 몽골식 복장과 머리모양이 78년 만에 고려 방식으로 환원되었습니다.

 

 

 

노국공주는 이와 같은 남편의 개혁과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녀는 그해 8월 남편과 함께 봉은사에 가서 태조 왕건의 진영을 알현했고, 복령사 등지에 가서 아들을 기원하는 불사를 올렸습니다.

 

기철 일파를 제거하기 두 달 전에는 남편, 시어머니 명덕태후와 함께 봉은사에 가서 보우대사의 설법을 들었고, 원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남편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여 금슬을 과시했습니다.

 

 

 

1353년(공민왕 1년) 노국공주의 아버지 위왕 볼로드테무르가 하남지역의 반군을 토벌하러 나섰다가 포로가 되자 원나라 내에서의 정치적 위상이 크게 추락했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었습니다.

 

그는 결혼한 지 10년 동안 후궁도 들이지 않다가 후사를 걱정하는 신하들의 성화가 끊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노국공주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서 1359년(공민왕 8년) 4월 이제현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했을 정도였습니다.

 

 

 

그처럼 노국공주 외에 다른 여성에게 무관심했던 공민왕은 글씨와 그림을 통해 예술적 역량을 한껏 과시했습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우리나라에는 명화가 매우 적지만 공민왕의 화격은 매우 높다.’면서, ‘지금 도화서에서 소장하고 있는 노국공주의 진영과 흥덕사에 있는 〈석가출산상〉은 모두 공민왕이 직접 그렸는데 간혹 갑제(甲第. 큰집)에 산수를 그린 것은 매우 기이하고 절묘하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공민왕은 사랑하는 아내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노국공주 역시 남편 못지않게 예술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에 따르면 그녀는 고려에 들어올 때 간책(簡冊. 대나무 쪽으로 만든 책)과 서화(書畫) 등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처럼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예술적인 감수성으로 소통하는 관계였습니다.

 

 

 

남편의 정치적 행보를 적극 지지하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에게 있어서 다정다감한 최고의 남편이었지만 정적들에게는 냉정한 승부사였습니다.

 

《고려사》에 ‘성품이 시기가 많고 잔인하여 심복인 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반드시 시기하여 그를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1352년(공민왕 원년) 9월, 공민왕은 조일신과 함께 정천기·최화상·장승량 등을 동원하여 원나라 기황후의 혈족으로서 권력을 남용하던 기철 일파를 공격했습니다.

 

조일신은 공민왕이 원나라 연경에 있을 때부터 수행했고 원나라 황실을 움직여 그를 보위에 오르게 했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일신은 지위가 높아지자 공민왕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놀이를 관람했고, 원 승상 탈탈(脫脫)의 경고문을 공민왕에게 보내 우부대언 김득배와 좌부대인 유숙을 파면케 하는 등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일신은 기철의 동생 기원을 살해한 다음 시어궁을 포위하여 판밀직사사 최덕림 등 기철 일파를 추종하던 신료들을 대거 척살했습니다.

 

거사가 마무리되자 조일신은 공민왕을 위협하여 자신을 우정승으로, 정천기를 좌정승으로 임명하게 했고, 사흘 뒤에는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이고 정천기를 투옥했습니다.

 

이런 조일신의 행위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한 공민왕은 이인복과 상의한 뒤 거사 7일째 되는 날 조일신을 유인하여 일거에 죽여 버렸습니다.

 

 

 

기실 이 사건은 공민왕이 조일신을 이용하여 기철 일파를 공격하게 한 다음 원나라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를 다시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노국공주는 조일신이 기철 일파를 공격할 때 남편과 함께 별궁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한밤중에 빠져나와 시어머니 명덕태후의 처소로 다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앙심을 품은 기철 일파가 명덕태후를 공격할까봐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 5년) 5월, 연회를 핑계로 눈엣가시 같았던 기철을 비롯하여 권겸·노책 등 부원세력을 대궐에 불러 모은 다음 모조리 척살하고 그 가족들까지 깨끗하게 제거했습니다.

 

그와 함께 평리 인당과 동지밀직사사 강중경을 서북면병마사로 삼아 원나라에 빼앗겼던 압록강 서쪽 팔참을 회복했고, 밀직부사 류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함주·북청 등지의 여러 성을 되찾았습니다.

 

 

 

원나라는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기황후 일족을 살해하고 군사도발을 감행하자 80만 군사를 동원하여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허장성세에 불과했습니다.

 

그 무렵 원나라는 반원복송(反元復宋)의 기치를 높이 내건 홍건적에게 밀려 남경을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그해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고려를 문책하자 공민왕은 서북면병마사 인당을 희생양으로 삼아 원나라와 화해를 도모하면서 더욱 굳은 내부결속을 꾀했습니다.

 

 

 

흥왕사의 변, 온몸으로 남편을 구하다

1359년(공민왕 8년) 12월, 4만여 명의 홍건적 무리가 압록강을 넘어오더니 20일 만에 서경을 함락하고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그로 인해 의주·정주·평양 등지에 백성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였습니다.

 

고려군이 죽기로 싸워 1360년(공민왕 9년) 2월 홍건적을 압록강 밖으로 밀어냈지만 이듬해인 1361년(공민왕 10년) 10월 홍건적이 재차 침입하여 두 달 만에 수도 개경이 함락되는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궁지에 처한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불과 28명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개경을 빠져나와 11월 20일 임진강을 건넌 다음 남쪽으로 피난하여 12월 15일 안동에 다다랐습니다.

 

당시 공민왕은 맹추위에 어의가 얼어붙자 섶을 태워 몸을 녹여야 했고, 노국공주는 가마를 버리고 말을 타야 했습니다.

 

안동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른 공민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에 임명하고 홍건적에 대한 반격을 도모했습니다.

 

 

 

정세운은 단기간에 20만 대군을 모집한 다음 1362년(공민왕 11년) 1월 안우·이방실·김득배·최영·이성계 등을 지휘관으로 삼아 개경을 총공격했습니다. 그 결과 고려군은 10만 명의 홍건적을 죽이고 개경을 수복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일등공신 정세운은 공민왕의 측근 김용이 보낸 거짓왕명으로 인해 동료인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 동료장수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김용은 세 명의 장수를 처형한 뒤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홍건적이 물러나자 공민왕은 안동을 출발하여 청주에 잠시 머물다 1363년(공민왕 12년) 2월 개경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개경은 홍건적의 만행으로 인해 궁궐이 남아있는 것이 없고, 시가지는 빈터가 되었으며 백골이 언덕을 이루고 있을 만큼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공민왕은 강안전을 수리할 때까지 흥왕사를 임시궁궐로 삼았습니다.

 

 

 

그해 3월 1일 새벽, 김용의 부하 50여 명이 흥왕사를 습격했습니다. 그들은 문지기를 죽이고 공민왕의 침전으로 달려가자 왕을 지키던 군사들이 놀라 달아났습니다.

 

이때 공민왕은 환관 이강달의 등에 업혀 명덕태후의 처소로 도망쳤고, 환관 안도치가 공민왕 대신 이불을 덮고 누웠습니다. 침실에 난입한 반란군은 안도치를 공민왕으로 오인하고 살해했습니다.

 

 

 

갑작스런 변란 소식에 놀란 노국공주는 명덕태후의 처소로 달려가 남편을 밀실로 들여보낸 다음 입구를 온몸으로 가로막았습니다.

 

공민왕은 밀실에서 담요를 뒤집어쓴 채 숨어있어야 했습니다. 곧 반란군들이 그곳으로 몰려왔지만 입구를 막아선 노국공주를 감히 어쩌지 못하고 조바심을 태웠습니다.

 

 

 

잠시 후 급보를 들은 밀직사 최영, 부사 우제, 지도첨의 안우경, 상호군 김장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흥왕사로 달려와 공민왕을 구원했습니다. 이때 김용은 자신이 반란과 무관한 척하면서 사로잡힌 부하들을 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수상한 행적을 눈치챈 대호군 임견미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습니다.

 

최측근 심복의 반역 사실을 알게 된 공민왕은 그때부터 신하들을 믿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을 구하는 데 목숨을 걸었던 아내에게만 무한신뢰를 바쳤습니다.

 

 

 

난산으로 인한 죽음, 고려의 불행이 되다

노국공주는 공민왕과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자 이제현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지만 자신에게만 오로지하는 공민왕의 일편단심 때문이었는지 그쪽에서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고려사》에는 당시 그녀가 혜비에게 질투심을 품었다는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공주는 다시 후회하여 수라를 들지 않으니, 내관들과 궁녀들도 여러 가지로 혜비를 비방했다. 그리하여 공주도 점차 질투의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듯 공민왕의 후계가 불확실한 탓에 1356년(공민왕 5년) 전 호군 임중보가 충혜왕의 서자 석기를 옹립하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1362년(공민왕 11년)에는 기황후의 명에 따라 원나라 조정에서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임명했고, 이듬해 12월 최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공민왕 토벌에 나섰습니다.

 

다행히 최영과 이성계의 맹활약으로 최유의 군사를 몰아내고 위기를 넘겼지만 불안감은 여전했습니다.

 

 

 

다행히 1364년(공민왕 13년) 중순 드디어 노국공주가 태기를 보였습니다.

 

공민왕과 결혼한 지 15년 만의 경사였습니다. 이듬해인 1365년(공민왕 14년) 2월 그녀가 만삭이 되자 공민왕은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사면하면서 공주의 순산을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이가 30대 중반에 이른 노국공주의 첫 출산은 누가 봐도 위험천만했습니다.

 

운명의 2월 16일, 그녀는 난산으로 몸부림치던 노국공주는 “내 배를 갈라야 아이가 숨을 쉴 테니 칼을 가져오라!”라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왕비의 몸에 칼을 댈 수 있는 내관은 없었습니다.

 

 

 

결국, 공주는 그토록 소원하던 아기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민왕은 사랑하는 모자의 충격적인 죽음 앞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찬성사 최영이 다른 궁전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간청했지만 “내가 공주에게 그렇게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피하여 내 한 몸만 편하게 있을 수 없다.”라며 거절했습니다.

 

 

 

평생의 유일한 연인이자 동반자를 잃어버린 공민왕은 오랫동안 비탄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안식을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킵니다.

 

그는 직접 그녀의 무덤을 설계한 다음 9년여에 걸쳐 개경 서쪽에 정릉(正陵)을 건립했고, 곁에 자신의 무덤인 현릉(玄陵)을 만들어 죽은 뒤에도 함께하고자 했습니다.

 

두 능은 조그만 구멍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영혼이 만나기 위한 통로라고 합니다.

 

 

 

공민왕은 이후에도 그녀에 대한 애모의 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죽은 뒤 3년 동안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고, 새로 부임하는 신료나 사신들에게는 정릉으로 가서 예를 행하게 했습니다.

 

수라를 뜰 때는 그녀의 초상화를 놓고 몽골음악을 연주하게 한 다음 그녀가 살아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노국공주가 죽은 지 8년이 지난 1373년(공민왕 22년)에 이르러서도 공민왕의 행태는 여전했습니다.

 

그 사이에 후사를 잇기 위해 익비 한씨, 정비 안씨, 신비 염씨 등을 후궁으로 맞아들였지만 조금도 정을 주지 않았습니다.

 

명덕태후가 왕을 불러 간곡하게 동침을 권했지만 “공주만한 자가 없습니다.” 하면서 눈물을 쏟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처럼 공민왕의 사랑을 받지 못한 후궁들은 저마다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번째 후궁인 혜비 이씨와 다섯 번째 후궁 신비 염씨는 공민왕 사후에 출궁 하여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급기야 공민왕의 노국공주에 대한 상사병은 폭음과 폭력으로 이어졌고, 자제위 소속의 미소년들과 어울려 동성애를 탐닉했습니다.

 

그 무렵 승려 신돈의 소개로 만난 반야가 아들 모니노를 낳았지만 정릉 공사에 몰두하던 공민왕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자제위 소년들에게 후궁들을 겁탈하게 하는 등 광태로 이어졌고, 결국 1374년(공민왕 23년) 내시 최만생과 홍륜·한안·권진 등 자제위 소년들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공민왕의 비극은 분명 노국공주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순산했다면 고려의 운명은 좀 더 길게 이어졌을는지도 모릅니다.

 

공민왕 사후 고려의 역사는 겨우 18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새 나라 조선(朝鮮)의 탄생은 어쩌면 지고지순의 남자 공민왕과 노국공주라는 몽골여인의 지독한 순애보에서 싹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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